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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우리가 보낸 모니터링은 스팸이었다
    일상 일기/내가 일을 대하는 태도 2021. 5. 9. 03:14

    일을 할 때 늘 '목적'을 고민한다.

    이 일은 왜 하는 것일까, 이 일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?

     

    인턴을 하며 매일 언론, 포털, SNS 모니터링을 했다.

    자사와 경쟁사 키워드를 가지고 새로운 글이 올라오면 보고하는 일.

     

    그 일을 누군가는 단순 복사, 붙여넣기로 생각했지만

    나는 이 일을 왜 하는지 궁금했다.

     

    그렇게 내린 결론은 '우리 것에 적용할 포인트를 찾기 위해'였다.

    그렇다면 이 일의 다음은 무엇일까?

    바로 새로운 서비스 기획, 콘텐츠 기획 등 기획 단의 일들이었다.

     

    그렇다면 기획자들에게는 모니터링한 내용들이 제대로 가고 있었을까?

    아니었다.

    그래서 새로운 인턴들이 오기 전, 모니터링 양식 변경 요청이 들어왔다.

    군 말 없이 했고, 더 보기 편하게 바꾸고, 다른 담당자들의 피드백이 들어오면 즉각 수용했다.

    특이한 기사나 콘텐츠가 있으면 사수에게 정리해서 즉각 보고했다.

     

    하지만 우리의 모니터링은 '스팸'이었다.

     

    매일 하던 모니터링 업무를 시간과 필요성의 이유로 주 2회로 줄이자고 했을 때, 나는 반대했다.

    마케터라면 하루에 하나쯤은 인사이트를 찾고 공유하는 연습이 필요한데, 모니터링을 하면 자연스럽게 그 연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. 그리고 좋은 인사이트를 발견해 공유한다면 기획자도, 다른 마케터도 레퍼런스를 찾을 시간을 줄일 수 있다.

     

    나는 매일 큐레이터의 마음으로 모니터링을 했기 때문에 산업의 흐름도 알 수 있었다.

    그리고 경쟁사의 서비스도 파악할 수 있었다.

     

    나는 목적을 가지고 일했다. 그래서 필요성을 느꼈다.

    하지만 다수는 그렇지 않았다. 그리고 나는 설득하지 않았다.

    결국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모니터링은 주 2회로 줄어들었다. 

     

    지금 생각해보니 모니터링은 메일링이 아닌 큐레이터처럼, 뉴스레터처럼 슬랙 채널에서 전달했어야 했다.

    자사의 불만 글은 CS팀이 봤어야 했다. 하지만 수신자 명단에는 없었다.

    각 사업 팀장, CEO들과 마케팅 팀이 수신했다.

    높은 자리일수록 봐야 하는 메일이 많다.

    하지만 모니터링 메일은 길게 제목만 늘어져 있었고, 시간을 내서 봐야 하는 글이었다.

    팀장님의 모니터로 살짝 본 우리 메일은 늘 읽지 않음이었다.

     

    그리고 며칠 후 똑같은 기사를 인용해 팀원들에게 한 번 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.

     

    그 때 조금 더 나서서 얘기했다면 어땠을까?

    이 일을 하는 목적을 설명하고,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공유했다면?

     

    인턴은 인사이트를 찾아내고, 논리있게 정리하는 연습을 할 수 있고,

    기획자와 마케터는 소비자와 경쟁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,

    팀장들은 불필요한 시장조사를 지시하지 않아도 되고,

    팀원들은 똑같은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통에 드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았을까?

     

    노력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일을 대할 때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, 큰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있다는 것은 내 강점이다.

    하지만 목소리를 높여 바꾸자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는 것은 내 단점이다.

    물론 인턴이었기에, 그 자리가 가진 무게가 가볍기 때문에도 그랬다.

    모니터링 사건은 10개월간 일하면서 아쉬운 순간 중 하나였다.


   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나는 대기업, 특히 매우 수직적인 대기업은 가기 힘들 것 같다.

    내 자리의 무게보다, 말의 무게가 중요한 곳에서 일하고 싶다.

    (그리고 그런 대기업에서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.)

     

    어디에서 일하게 되든 앞으로도 이런 습관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.

    또, 더 논리있고, 조리있게 말하는 방법을 공부해야겠다.

     

    마지막으로,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남도 납득하지 못한다.

    반대로 나를 납득시킬 수 있다면 상대방도 납득시킬 수 있다.

    더 당당해지자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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